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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essay

[북리뷰] 김대식의 빅퀘스천 - 1장

by 쪽과종이 2014. 12. 12.

리뷰 - 김대식의 빅퀘스천 BIG QUESTION 1장








질문과 답변의 책은
이 책에 서술된 다양한 지식인들의 고뇌와 답변과 같이
개인적으로 내는게 좋다고 보고
개인적으로 답을 적어보기로 한다


1장.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 삶과 의미가 무엇인가? 가 먼저 논의되어야 한다.

논하고자 하는 의미 그 자체에 대한 의미가 논의된 후에야 답을 줄수 있다고 본다.
고로 삶 자체와 의미 자체에 대한 것을 정의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 삶의 의미라는 장의 각론에 논한 후에 답을 논해본다.


1.1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 존재/비존재, 무/유 라는것을 먼저 논한 후에 논의되어야 한다.

존재와 비존재는 쉽게 무/유에 대한 정의로 귀결시키기도 한다.
무/유는 인지객체에 대해 의미가 있는가 없는가로 치환된다고 본다.
또한 이 인지객체라는 것은 바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주체에 해당된다고 본다.

무라는 것은 존재일수도 있다.
양자요동이라는 실체적 존재를 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 존재가 인지객체에 있어 의미가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이며,
고로 무라는 존재는 인지객체에 있어 비존재가 된다.

유라는 것은 비존재일수도 있다.
신이라는 비실체적 비존재를 유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그 비존재가 인지객체에 있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의미이며,
고로 유라는 비존재로서 존재된다.

고로 무/유라는 것으로 존재/비존재를 정의할 수 없다.
무/유는 무의미/유의미로서 정의되는 인지객체의 공리적 산물이며
존재/비존재는 실체/비실체로서 정의되는 인지객체의 현상적 산물이다.
고로 무/유로 존재/비존재를 논하는것은 맞지 않다.

여기서 인지객체가 무엇인가가 필요해진다.

쉽게 인지객체를 인간으로 정의하는데, 그것은 인간의 인식오류이다.
인간 또는 생물체로 정했다면 위의 설명은 모두 오류를 발생한다.

인지객체라 함은 상대존재와 의미를 상호인지 작용하는 모든 존재객체를 말하며
이는 양자요동 수준이든 우주외부 수준이든 모든 존재객체에게 해당된다.

그렇다면 그 존재객체에게 의미라는것은 무엇인가?
생명체 수준으로 보면 인지인식을 했느냐 라는 것으로,
비 생명체 수준으로는 상호작용을 했느냐 라는 것으로 귀결된다고 본다.

고로 인지객체가 존재 그 자체이다.

신이라는 것으로 무/유, 존재/비존재를 해결하려는 행위는
복잡한 문제를 누군가에게 떠맡기고 해결했다고 하려는 회피심리의 요식행위이다.
(* 신이 무엇인가라는 것은 숫자 1이 무엇인가와 동일한 내용임으로
여기서 논의는 제외하고 해당 각론에서 논의한다.)

이 각론에서 책은 양자역학적 답을 제시했다.
"물체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유로 존재한다"

본문의 답에 기본취지는 동의하나 일부는 동의하지 않는다.
안정-불안정과 완전-불완전에 대한  차이가 있다고 본다.

안정은 어떤 순환궤이고, 불안정은 그 순환궤로 가는 과정이다.
허나 물체의 안정자체도 단지 시간이 오래가는 불안정 순환궤의 하나이다.
여기서 순환이라고 볼수 있는 기준은 대부분 인간기준의 시간을 사용한다.
즉, 인간기준을 배제한다면 안정 역시 불안정의 일부이고
안정/불안정 모두 불완전의 일부이다.

변하지 않음을 안정이라고 말하고자 했을수도 있다.
하지만 양자역학적으로도 그 안정이라는 것 자체는 안정적인 순환, 즉 변환의 궤를 말하는거지
무변환을 말하는것이 아니다.
따라서 양자요동 역시 변환의 궤에 해당된다.
즉, 무라고 말하고자 하는 그것도 존재자체이다.

무라는 것은 모든 인지객체에 있어서 무의미 해야 함으로
완벽한 안정성 즉 완전을 가져야만 그 어떤 상호작용이 없어 모든 대상에게 상호작용이 무의미 해진다고 할수 있다.
특정 안정 또는 불안정성은 불완전이며, 그 불완전이 타객체에게 작용을 제공함으로 의미가 발생되기 때문이다.
고로 불완전이 있다는 존재가 의미발생의 시작이며 그 근원으로 말미암아 유의 발생이다.
물질은 불완전 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단지 안정적으로 보이는 궤에 있을 뿐이다.

그 갇혀 있는 궤를 에너지라고 해도 좋다고 본다.
물길을 막아 댐을 만들면 댐이라는 물질과 에너지를 가지게 되는것과 같다.
그냥 물질=에너지가 아니라, 또는 물질이 있어서 에너지가 있는게 아니라,
물길=에너지를 막았더니, 또는 순환시켰더니 물질이라는 궤 또는 그릇이 생긴것이다.

그럼으로 나의 답은 다음과 같다.

문 :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해 :
"완전한 존재가 있다면 그 어떤 인지/상호작용이 발생되지 않아 무가 된다."
"불완전한 존재가 있음으로 인지/상호작용이 발생됨으로 유가 된다."
"고로 신이라고 얼버무린 유의 창조주는 불완전함 그자체이다."
"불완전은 완전함으로 이행하려는 흐름을 가진다."
"완전함이란 그 어떤 상호작용을 일으키지 않는 흐름으로 에너지/물질/의미인지, 순환 또는 무순환인지도 알 수 없다."
"상호작용을 제공할 수 있는 흐름이 에너지/물질/의미 순환이라면 이는 유의 존재이다."
"에너지/물질/의미 순환이란 순환이라는 궤때문에 완전함으로 이행되지 못하는 궤에 갇힌 불완전 존재이다."
"또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의 이행도중 일시적인 소용돌이 흐름 또한 소용돌이라는 궤에 의한 불완전 존재이다."
"양자역학적 양자요동 에너지/물질 순환 역시 궤에 갇힌 순환이며 이는 유의 존재이다"
"에너지 또는 물질이라는 존재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가고자 하는 에너지가 어떤 궤에 갇힌 것을 말한다."
"의미라는 정보는 에너지/물질간 상호작용 그 자체를 말하는 유의 존재이다"
"궤의 복잡도가 크기이며, 이 크기가 물질의 크기이며 에너지의 크기이며 의미의 크기이며 유의 크기이다"

답 :
"존재가 존재되는 이유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가려는 흐름이 궤에 갇혀 상호작용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댐(물질)이 있어 수력(에너지)이 생긴게 아니라, 물길(에너지)이 막히더니 호수(물질)가 생긴것이다."


1.2 우리는 왜 먼 곳을 그리워하는가 


--> 갑자기 먼 곳이 왜나온지 궁금하긴 하다.

"그래서 인간은 모험과 탐험을 통해 끝이 존재하지 않는것을 증명하려는지 모른다"

책에서 서술된 일종의 답인데,
시작과 끝의 부존재 증명이라는 답으로 질문을 유추해보자면
존재존속의 시종을 찾고자 하는듯 하지만
그게 먼곳 탐험이 빅퀘스쳔이 되는 이유로 보이지는 않는다.

내맘대로 질문과 해답을 재정의 해본다.

문 :
"인류는 왜 먼곳을 탐험하는가"
"남성은 왜 먼곳을 탐험하는가"

해 :
생명체의 생존향상 목적으로 탐험이 발생되는건
생명체집단이 속한 환경에서 탐험을 통한 존속환경 확대가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현재 환경이 생존에 영원히 유리하다면 탐험의 가치가 없지만
환경변화에 따른 생존향상을 위해서는 환경탐험의 가치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특히 남성집단이 그것에 더욱 특화되는 이유는
남성이라는 존재자체가 생명 다양성을 위한 여성의 선택으로 말마암아 탄생되었으며
생명다양성의 가치 자체가 생식행위 외에도 생식환경 확대라는 가치가 있기 때문이며
생식환경 유지 및 확대임무를 남성에게 부여하지 않는 생명체라면 남성은 생식후 소멸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노동 또는 탐험이라는 가치로서 남성의 존재가치가 이어지기 때문이라고 본다.

답 :
"그것은 인류의 생존향상을 위한것"
"그것은 남성의 가치존속을 위한것"

(* 존재존속의 시종이라는 답은 시공간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보이며
이는 해당챕터에서 논한다.)
(* 이 챕터는 에너지 퍼짐과 연관지어 다시 쓰기로 한다.
이후로도 무관하다고 한 챕터는 모두 유관하게 다시 쓸것이다.)


1.3 원인이란 무엇인가 


--> 인과관계의 근원을 분석으로 찾고자 해서는 안된다.

단순 인과관계라면 결과와 원인을 인간의 인지능력이 주는 분석으로 찾으면 된다.
허나 인과관계의 근원을 찾고자 하는 행위는 분석이라는 기술로는 찾을 수 없다

분석이라고 한다면 잘게 쪼개고 나누어 가는 과정으로 그 인과관계를 찾아가는건데
원인의 원인, 근본원인을 쪼갠다는 행위 자체는 분석이라는 행위와 대치되는 의미이다.
분석으로 나눈다음에 그 나눠진 알갱이들 간의 관계를 찾는다면
이미 그 쪼갰다는 원인은 근본원인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반복된 관찰이 아닌 반복된 개입이 존재간 상호관계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다."
"반복된 개입은 한계가 있다. 우리의 존재는 반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책에서 서술된 답인데
반복된 개입이란 것을 오답을 줄이는 방법이라는 건지,
올바로 이해라는 것을 해결로 이해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이 또한 분석기술의 오답을 줄이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면
근원이라는 것에 접근을 못한다는 결론으로 봐야 한다고 본다.

이에 대한 문답을 내보자면 다음과 같다.

문 :
"원인이란 무엇인가?"

해 :
"상호작용의 다른말이다."
"상호작용이란 유의 의미를 말한다."
"유의 의미는 불완전함이 제공하는 상호작용이다."
"고로 완벽함/완전함이라는 근원을 분석하여 찾아내려는 행위자체가 오류이다."

답 :
"불완전함 자체가 원인이다."


1.4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어떠한 삶이 바람직한가를 논의하자면 삶이 무엇인가를 논해야 한다.

"인생은 싸움이고 전쟁이다"
"탄생과 죽음이라는 변치않는 두 점사이에 메달려 있는 인생"
"좋은 삶과 나쁜 삶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본질에 따라 결정된다"

책에서 서술된 삶에 대한 내용이다.

내용을 보자면 삶은 어떤 환경내의 존재가 변화하는 총체이다.
최초 변화의 시작은 탄생이며, 종결은 죽음이며
이후 변화는 끊임없는 환경 또는 자아와의 싸움이고 전쟁이며
이 변화의 바람직함이란 환경에 대한 상대적이라는 내용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삶의 전부일까?

삶의 정의는 삶의 주체에 대한 정의를 특정함으로서 시작된다고 본다.
각론의 제목에서 "우리"라는 단어는 본문에서 환경속의 인간으로 특정함으로서
이 삶은 지구내 각 국가의 인간의 삶을 의미하게 되는것이다.

그렇다면 환경내 인간으로서의 "우리"라는 삶의 올바름이 올바른 삶에 대한 근원적 질문인가?
아니라고 본다.

삶을 논하는 "우리"는 모든 유의미한 존재를 포괄해야 한다고 본다.
삶의 정의에서 나타는 환경이라는 존재 역시 "우리"에 포함되어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환경이라는게 절대적으로 존속되지 않는데
환경기준으로서 인간의 삶의 올바름을 말해버리면
올바르지 않은 환경기준에서 올바른 인간의 삶이란 결국 올바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환경 자체에도 올바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존재를 포함한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
모든 존재를 포함한 올바른 삶은 무엇인가?

문답을 내보자면 다음과 같다.

문 :
"모든 존재의 우리의 올바른 삶은 무엇인가?"

해 :
"모든 존재를 포함한 올바름이란 완전함을 의미한다."
"그러한 완전함은 무이다"
"그렇다면 유의미한 올바름이란 완전함으로 이행되는 변화과정에서 가치가 존재된다."
"완전함으로의 이행의 올바름은 상호작용의 결과로 인한 변화가 전체궤의 완전함의 이행에 맞아야 한다"
"전체궤란, 인간을 구성하는 개체부터, 우주를 구성하는 개체까지 포함된다."
"자아,사회,국가등 인간위주 개념부터, 양자부터 우주까지 포함된다."
"이 우주의 변화는 모두 완전함으로 진행되고 있는 단계이다."
"그걸 신의 의지라고 해도되고, 물리법칙이라고 해도 된다."
"그렇다면 올바르지 않음, 악은 무엇인가?"
"불완전함의 소용돌이/순환 궤가 완전함으로 이행되어 지는 단계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아니, 그건 완전함이 완성될 때까지 계속 나타난다.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게 완전함이다."
"인간의 시공간 범주에서 그 궤들은 올바르지 않음의 세기로서 인지된다."
"즉, 인간에게서 올바름으로 인지된 그것은 올바르지 않음이 약하다는 의미이다."

답 :
"올바른 삶이란 자아와 우리와 환경과 우주 모두 완전함을 향해 점차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시공간을 넘어서 말이다."



1.5 친구란 무엇인가 


--> 생물체 사회내 우호집단을 말하고자 한다면 우호의 주체인 자아의 범위를 먼저 말해야 한다.

친구란 우호적 자아의 인격분할적 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인격분할적 인지는 사람 개체로서의 인식이고, 특정 인간일수도, 특정 인격일수도 있다.
우호적 자아란 자아라는 존재의 생존성에 유리함을 말한다.

그럼 이 자아라는 것은 무엇일까.

자아는 흔히 신경계 시뮬레이션의 판단 주체로서 말해지는데
자아는 판단 주체가 아니라 시뮬레이션 내 주 판단 피객체라고 본다.
주 판단 피객체를 나라는 것과 동일시 하는 행위가 생물체의 두뇌가 하는 행위이고
이를 의식적으로 분리인지 하느냐 아니냐가 상위인지 또는 상위자아라고 할수 있다.

친구라는 우호집단은 주판단피객체에 밀접한 관계로 포함된다고 본다.
즉, 자아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 그 친구의 모든 인격, 생물학적 실체 아니라,
그 친구가 시뮬레이션된 내 두뇌내에서의 인격을 말한다.
즉, 생물학적 친구가 아니라 신경학적 친구 말이다.

책에서 서술된
"친구란 또 하나의 나", "친구란 어쩌면 나의 아바타"와
비슷한 말이다.

책에서 주로 서술된 불완전 사회구조에서 인지회계라는건
약 수십만년에 걸쳐 진행되어온
인간사회라는 불완전 궤에서 나타나는
친구인격 포함 자아범주 확장을 통한 생존확률 증가행위의 한 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친구라는 생물이 아니라, 친구라는 인격을 내 자아의 범주에 넣고 있다는데
인격이란 무엇이고 왜 타인의 인격을 내 자아에 넣고 있을까?

인격이라는 것 자체는 한 인간내의 고유성질이 아니라
한 인간과 타 객체사이의 관계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라고 본다.
우리 인간은 어떤 대상(주로 인간)과 관계를 맺을 때마다 인격이 발현된다.
그 모든 인격(생명대상관계), 또는 물격(물질대상관계), 또는 이격(이론대상관계)은
모두 각각 개별적으로 발현되며
그 발현은 실체가 자기 신경계로 현상된 사진과 같으며
이 현상된 자료들을 가지고 두뇌에서 모델링하여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다.

이 현상은 한번만은 아니다.
관계를 가질때마다 계속 사진이 찍혀 현상된다.
그중 인상적인 사진은 액자에 걸리고, 소소한건 앨범에 쌓이게 되고,
때론 관계의 사건기준으로 분류되기도, 스티커를 붙이기도 한다.
그중 우호적 사진이 주판단피객체에 분류되는 것이다.
즉, 친구라는 관계 사건의 모든 것도 아니고,
친구라는 관계 사건중 우호적인 사건들이 주판단피객체에 현상되는 것이다.

자아는 이 시뮬레이션의 주판단피객체이며
주판단피객체의 우호객체는 현상/모델링시 주판단객체에 포함된다.
실체적 타인은 주판단객체와 분리되지만
우호적 친구의 현상된 인격중 일부는 자아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이다.
이는 꼭 친구뿐이 아니라 가족/동물/비생물/형이상학적 대상도 포함된다.

친구라는 주제에 자아라는 내용으로 서술했는데
문답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문 :
"친구란 무엇인가?"

해 :
"인간은 친구라는 인격을 현상한다."
"현상된 사건중 우호사건이 자아에 현상된다."

답 :
"네 자아속에 현상된 우호성질 구성요소이다."
"인격만이 아니다."


1.6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 삶이 무엇인가는 논했고, 의미란 무엇인가를 논했었나?

이미 논했다. 의미란 정보라고.
따라서, 삶의 의미는 삶이라는 대상의 정보라는 논리가 된다.

허나, 삶의 의미는 삶의 가치있는 의미라는 단어로 통용되고 있다.
또는, 삶의 의미는 행복한 삶이라고 말해지기도 한다.
논리적으로 딱딱함이 비인간적이였는지
가치 또는 행복이라는 인간적 의미를 더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의 의미는 인간에 의해 부여된것 그것이 아닌가?

그러나 질문이 묘하다.
의미 있는가? 가 아니라,
의미 있어야 하는가? 이다.

책이 제시한 답은 다음 문장들인지 싶다.
"삶의 의미란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삶과 삶의 관계라는 동일단어 반복 난센스에 빠진다."
"어차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인생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의미 없는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이다."
"인생이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동안 흘러 없어지는 바로 그것이다."

볼땐,
삶의 의미라는 것을 '삶'과 '의미'가 아니라 '삶의의미' 라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본다.
논리적으로 무의미, 없는것 이라고 삶의의미를 정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의미를 의미로 보지 않고, 삶을 삶으로 보지 않고
삶의 의미를 무의미로 처리하려고 하는걸까?

어쩌면,
신에게 맡겨보는 심리와 같이
무에게 맡겨보려는 심리로 동작한게 아닌가 싶다.

나름대로 문답을 내보자면 다음과 같다.
간단하다.

문 :
"삶의 의미 있어야 하는가?"

해 :
"삶은 변화의 총체이다."
"의미는 상호작용의 총체이다."
"상호작용의 결과는 변화이다."

답 :
"삶 자체가 의미이다."




1.7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 아름다움이란 완전함을 추구하는 궤이다.

이 책의 모든 질문중 가장 괜찮은 질문이다.
자, 아름다움은 생명체만이 가지는 개념일까?
그렇다면 생명체가 느끼는 아름다움은 무엇일까?

책에서 서술된 내용들은
생명체가 가지는 진화론적 아름다움과, 인간의 이성적 아름다움 말하고 있다.
아름다움과 추함을 대조함으로서 아름다움을 특정지으려 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조화 또는 생존으로 대치하려 하고 있다.
그것으로 아름다움을 특정할 수 있을까?

아름다움은 완전함에 대한 흐름의 발로라고 본다.
그것이 인간일수도, 생명체일수도, 비생물의 어떤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궁극의 아름다움, 아름다움의 근원 따위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너무 인간 편향적인 아름다움은 안타깝지 않은가.
수많은 생물과 비생물에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답을 이렇게도 말할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아름답게"

고로 문답은 다음과 같다.

문 :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해 :
"인간에 국한해서는 안된다."
"모든 존재의 올바른 삶과 같다."
"올바른 삶이란 자아와 우리와 환경과 우주 모두 완전함을 향해 점차 변화되는 것이다."
"삶의 의미를 꼭 무언가와 동치시켜 보고자 한다면 그건 아름다움과 같은 의미이다."

답 :
"완전함으로 가는 궤."
"삶의 의미"



1.8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 무의미와 유의미를 동치시키지 말자

아주 훌륭하고 유명한 문장들이 많이 등장했다.

"나와 내 의식만이 실재하고, 다른 모든 것은 가상에 불과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지각과 의도로부터 독립시키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응용할 수 있게된다."
"매트릭스 레오야 빨간약 먹을래, 파란약 먹을래"

호접몽, 가상현실 이야기는 정말 흥미로운 주제이고,
인간 신경계 시뮬레이션에게 있어서 빼먹지 않는 주제이다.

그렇다면 매트릭스의 가정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시뮬레이션 우주론은 맞는가 틀린가?
이 질문은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다.
천동설이 맞는가 지동설이 맞는가?
황도는 가짜인가?

답은 다음과 같다.
천동설도 맞고 지동설도 맞다.
황도는 지구에게 있어서 가치있는 실체이다.
기준의 차이일 뿐이다.

말이 안된다고 하는가,
다르게 질문해 보자.

레오가 매트릭스내에서 날아다니는것은 우주내에서 실체하지 않는가?
내꿈에 내가 날아다니는것은 내 두뇌속에서 꿈이란 걸로 실체된건가?

모두 실체한다.
단지 실체의 환경이 다를 뿐
모두 실체한다.

그럼으로 모두 유의미한 실체이다.

수학적 개념으로 넘어가보자
자연수가 나타났다. 그리고 실수로 서술됐다. 그리고 복소수가 포함됐다.
그렇다면 자연수는 잘못된건가? 실수는 잘못된건가? 복소수는 가짜인가?
아니 수학계내에서 모두 실체한다.
단지 그 실체가 확장되었을 뿐이다.
외부의 실체가 새로 나타났다 해서 기존 실체가 무의미해질 이유가 없다.

우주의 창조주가 나타나면 인간은 무의미해지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 로봇을 만들어서 로봇만의 행성에 떨구었다면
로봇은 무의미한 존재인가?
그렇지 않다.

가짜기억이 심어진 인간 또는 로봇의 추억은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
가짜기억에 의한 추억이라는 의미 자체는 존재한다.

왜 유의미와 무의미를 구별하지 않는가.

불교적으로도 경계하는것이 무의미의 덫이라는 허무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도교적으로도 인간의 사유체계를 무의미가 아닌 유의미에서 찾는게 아닌가?

문답을 내보자.

문 :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해 :
"왜 환상은 존재하지 않는 환각이며 무의미하다고 하는가?"
"당신이 감각을 통해 실체를 느낀다고 하는것 그것 자체도 신경계 환상이다."
"그렇다면 꿈속이나 시뮬레이션우주까지 안가도 이미 환상속에 살고있다."
"정신분열증 환각속의 실체는 두뇌속에 존재하는가 아닌가."
"모두 존재한다. 기준이 다를뿐"
"내가 무의미하다고 느낀다고 해서 존재가 없어지는건 아니다"
"그건 진짜 무의미가 아니다. 누군가/무언가의 유의미를 내가 인지안했을 뿐이다."
"진짜 무의미는 그 누군가/무언가에게서도 반응되지 않음이다."
"마술로 재미를 줬다면 사업이고, 사기를 쳤다면 범죄다. 기준만 다를뿐"

답 :
"무의미의 상대성으로 유의미의 절대성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환상은 환상으로, 현실은 현실로, 기준은 기준으로 모두 존재한다."


1.9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 변할 뿐이다. 남겨질 뿐이다.

질문은 왜 죽어야 하는가인데
내용은 왜 죽는가, 노화이다.

모든 노화가 죽음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을건데
인간에게 있어서 노화는 죽음이니까 그럴수도 있다.

간단하다.
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시각 변한다.
상호작용에 의한 변화 그 자체가 삶의의미이고 실체이지 않는가.

그 변화중 극적인 변화가 삶의 시작과 종료인것이다.
그 역시 큰궤에서 볼때 변화의 일부이다.

차이가 있다면
정보의 남겨짐이다.

누군가의 신경계 시뮬레이션에 현상된 인격으로
어딘가에 기록되어진 인격으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이 현상되고 기록된 정보의 남겨짐은,
그 자체로서의 별도의 존재이다.

흔히들 인간의 모든 정보를 복사하면
영혼이 카피된다거나 죽지 않는거라고 생각하는데
영생에 대한 갈망이 가져다 주는 착각이다.

카피된 존재는 카피된 새로운 존재이다.
어제까지의 기억을 같이 가진 쌍둥이 동생일 뿐이다.
주민번호로 치자면 오늘날짜로 새로 부여받아야 하는 새인격체이다.

문 :
"인간은 왜 죽어야 하는가"

해 :
"변하지 않는 존재는 없다."
"누군가/어딘가에 현상되어 있거나 기록되어 남겨질 수는 있다."
"복제한다고 해서 그것이 당신은 아니다."

답 :
"변할 뿐이다. 남겨질 뿐이다."




1.10 운명이란 무엇인가 


--> 선택이란 무엇인가?

좋은 문구가 이 챕터에도 많다.

"어쩌만 나라는 존재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택들을 통해 나라는 존재가 만들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선택들의 연결한 가상의 선이 나라면
인류의 모든 선택을 연결한 가상의 선이 운명일 수도 있겠다."
"운명은 존재의 본질적 우연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약한 인류가
다 함께 꾸는 하나의 꿈이라고"

괜찮은 시선이다.
운명은 선택의 집합체라는 것에 동의하는 바이다.

한 세포가 있다.
이 세포는 계속 자신을 복제한다.
복제될 때 선택을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선택은 세포의 분열이전과 위치와 상황에 따라 영향을 미친다.
그 선택의 결과가 눈이 되기도 심장이 되기도 한다.
그 선택의 집합체가 바로 당신이다.
그렇게 태어났다.

한 인간이 태어났다.
이 인간은 계속 선택을 반복한다.
이 선택은 이전상황과 현재상황에 따라 영향을 미친다.
그 선택의 결과로 어떤 사회적 인격체가 된다.
그 선택의 집합체가 바로 당신이다.
그렇게 살아왔다.


문 :
"운명이란 무엇인가?"

해 :
"선택은 상호작용의 일부이다."
"능동적 선택이든 피동적 선택이든 상호작용의 일부이다."
"몇번이고 말해왔던 그것이랑 같다."

답 :
"운명은 선택의 집합이며,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아 모든 답이 다 똑같아서 미안하다"


1.11 영혼이란 무엇인가


--> 영혼은 발명한 것인가 발견된 것인가

"영혼은 발명한 것이다. 인간이" 이 챕터의 답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영혼은 발견한 것이다. 뇌속에서" 이게 답이라 주장한다.

말들어 냈느냐, 만들어 졌느냐의 차이가 무엇일까?
인지적 주체가 의식적으로 만들었느냐 무의식적으로 만들었느냐일까?
그럼 무의식이 무언지를 논해야 할까?

인간이 단세포 동물시절에도 영혼을 느꼈다면
그것은 인간이 만든것일까? 발견한 것일까?

모든 동물은 영혼을 느낀다.
왜냐하면 실객체의 현상된 데이타를 모델링을 기반으로한 시뮬레이션이
바로 그것이 영혼이기 때문이다.


신경계 속의 어떤 인격이 다시 신경계 내에서 현상되는 과정이 그것이다.
그게 꼭 시신경으로 보여야만이 아니다.
시신경으로 그 현상된 시뮬레이션이 보이는건 다른문제이지.

따라서 인간은 발견했을 뿐이다.
무의식적으로.
대뇌의 의식적 행위와 무관하게 말이다.

어느 장소에서 무언가를 봤다면, 시신경으로 그걸 반응했다면,
그건 무의식적으로 뇌속에서 시뮬된것이 증강현실로 합성된 것이다.
생생한 꿈을 눈뜨고 꾼것과 같다.

프로토셀 단위에서도, 단세포 단위에서도, 집단세포 단위에서도, 거대생물체 단위에서도,
인간개체 단위에서도, 집단구성에서도, 국가에서도,

국가라는 곳에서도 영혼이 떠돈다.
인간이 시뮬레이션 로봇이라는 걸 잘아는 분들이
다양한 사회적 도구를 통한 자극으로 겁주는건
사회적 영혼을 발현시키기 위한 기작이 아닌가?

인간은 데이터를 발명하고 전파시키며,
인간은 데이터를 발견함으로 작용되어 시뮬된다.

결국, 영혼이란 상호작용의 일부이다.
단지, 개체에 따라 인지를 어떻게 했느냐의 차이만 있을뿐.


문 :
"영혼이란 무엇인가?"

해 :
"집신벌레를 잡아다가 겁을 주면 겁먹을까?"
"아니 그 이하 프로토셀 수준에서의 주변반응은 무엇인가?"
"그럼 다세포계인 인간의 모든 세포는 모두 영혼을 가지는가?"
"그렇다. 기준이 다를뿐"
"운명이라는 선택의 모든 세포의 선택, 인간의 모든 선택
현상된 인격/사건들, 그 총체의 모델링이 영혼이다."
"나의 영혼, 상대의 영혼, 미지의 영혼, 누군가 부여한 영혼은
내 모델링 데이터의 일부가 시뮬레이션 된 결과이다."

답 :
"영혼은 발견되고, 모델링되고, 시뮬레이션 된다. 뇌속에서."
"눈 뜨고 꾸는 꿈. 그것이다."




1장이 끝났다. 1장을 마무리 해보자

1장. 삶은 의미 있어야 하는가 


각 장의 문답중 삶과 의미부분을 모아 적어도 답이 된다.

--> 불완전함 자체가 존재이다.
--> 불완전함 자체가 원인이다.
--> 완전함으로의 이행이 변화이며, 존재하는 사유이며, 그것이 삶이다.
--> 올바른 삶이란 자아와 우리와 환경과 우주 모두 완전함을 향해 점차 변화되는 것이다.
--> 아름다움이란 완전함으로 가는 궤이며 그것이 삶의 의미이다.
--> 무의미의 상대성으로 유의미의 절대성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장의 주제에 결부되지 않는 각 챕터가 있어 아쉽긴 하지만
그 각각 각론으로서 의미가 있긴하다.
별도로 모아놨으면 더 좋았을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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