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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per/essay

[북리뷰] 김대식의 빅퀘스쳔 - 2장

by 쪽과종이 2014. 12. 25.


리뷰 - 김대식의 빅퀘스천 BIG QUESTION 2장






2장을 보자.
본문에서 1장의 존재론을 바탕으로 2장에서는 사회정의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찬가지로 기거론한 나름의 존재론을 근거로 나름의 사회정의를 말해보고자 한다.



2장.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 이 정의가 정의인지 정의인지 그걸 정의해야한다.

정의가 올바름이라면 똑바름이라는 정의가 정의이다.
과연 이 정의가 바른가?

각론을 살펴본후 정리해본다.



2.1 진실은 존재하는가 


--> 환상의 반대말이 진실인가? 정의의 반대말이 진실인가?

이 챕터에서는 21세기 위대한 증명-불완전성 증명이 나와서 반가웠다.
진실에 관한 정의의 역사에 이르러 종착역이 불완전성 증명이 맞는가는 다른 논제 같긴 하지만
어쨌든 환상-정의-증명에 이르르는 일련의 진실찾기는 훌륭하다고 본다.

진실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답에 확연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문답을 내보자면 다음과 같다.

문 :
"진실은 존재하는가"

해 :
"환상의 반대말이 진실인가?"
"정의의 반대말이 진실인가?"
이 문제는 다음으로 풀이해야 한다고 본다.
"어떤 사건,사고를 표현하는 단어는 반드시 그 실체,진실의 전체를 남김없이 포괄하는가?"
"아니다."
"자연수는 실체의 갯수를 완벽히 대표하는가?"
"아니다"
"그럼 진실은 오로지 인간에 의해서 정의되는것인가?
"아니다"
"인간기준 진실은 정의된 것이다."
"물성기준 진실은 작용된 것이다."
"고로 인간기준 진실 역시 작용된 것의 일례로 동일하다."
"인간기준 진실의 인지, 진실을 표현한 언어의 오류는 다른 문제이다."
"오류가 없는 인간의 표현은 불가능하다."
"허나 오류가 있다해서 진실이 환상이 되는건 아니다."
"오류는 all or nothing의 이분론이 아니라 99.9%, 99.999%의 정밀성의 문제이다."

답 :
"작용의 결과와 진실은 다른걸 의미하지 않음으로 진실이란 작용의 결과로서 존재한다."
"무오류를 통해 진실을 찾고자 하는건 존재의 완벽함을 찾고자 하는것과 같다."
"더구나 인간 정의의 무오류가 진실과 동치되지는 않는다."
"진실은 영화필름이라는 현실로 존재하고, 정의는 그스냅샷으로 만든 포스터로 존재한다."
"포스터에서 무오류를 찾는거나 영화필름과 스크린에 영사된거가 같냐다르냐에 왜 집착하나."
"의미-실재간 정밀성을 높여보자가 결론이다. 언제까지? 우주끝날때까지"


2.2 인간은 무엇을 책임질 수 있는가 


--> 우울한 책임자와 행복한 무책임론자가 결론인가?

너무나도 간단한걸 왜 어렵게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문제가 나오는 이유는 바로 "면죄" 때문이라고 본다.
챕터 내용 거의 모두 면죄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단지 면죄가 주는 부정적 의미 때문에 책임이라는 긍정적 단어로 대치됐을 뿐이다.

우울한 책임자란 존재자체가 면죄받을 수 없음을 보고 괴로워하는거고
행복한 무책임자란 존재자체가 불완전임으로 면죄가 무의미하다고 보는거다.

간단하다. 문답 내본다.

문 :
"책임인가? 면죄인가?"

해 :
이 또한 all or nothing의 오류 문제이다.
왜 어떤 사건에 대해서 완전책임 또는 면죄라는것으로 귀결시키려 하는 오류를 범하는가.
30의 선의 행동과 30의 부정의 행동이 있다면
30의 선의 칭찬과 30의 부정의 책임을 지면 된다.
30-30=0 에서 +0인가 -0인가 이라는 논리가 나올 이유가 없다.
30의 부정의 책임에서 면죄받고자 하는 면죄심리가 모든 인지를 왜곡시킨다.
종교적으로도 면죄는 신이 하는거지 인간이 하는게 아니다.

답 :
"면죄받으려고 의미왜곡하지 마라."
"면죄받지 않았다고 불행하다는 것도 왜곡이다."
"모든 존재자체가 불완전하다고 불행하다는 것도 편향이다."
"편향사고 때문에 불행의식/면죄의식에 굴복하는게 바로 지적생명체으로서 무책임이다."


2.3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 정의를 범주를 정의해보자

"세상이 지각없는 존재들의 세상이라면 정의로운 세상은 무의미하다"

이 챕터의 범주제한인데, 이부분이 문제의 출발이라고 본다.
정의가 올바름인지 똑바름인지 무슨바름이든간에
정의는 모든 존재의 완전함의 표상이며
이는 비단 인간으로 국한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챕터에서 주로 다루는 정의에 대한 사회이론들 역시 범주론의 일부라 본다.
즉, 어느범주까지 이롭게 해야 하느냐를 정의로 보고있다는거다.
나쁘지는 않다. 인간사회 전체를 범주로 논다면 인간사회적으로 순기능이 있기 때문에.
허나, 그것만으로 정의를 모두 논하는건 너무 작다.

경제적 정의를 정의로 국한시켜서 논한다 해도 너무 단편적이고 편향되기 쉽다.

경제만 놓고 정의를 정의하자고 한다고 해도,
경제흐름의 절반만 표현하지 말고 전체를 표현하는게 더 좋다고 본다.
경제적 정의를 분배로 절반만 표현하는데 순환이라는 전체를 놓고 보자는거다.

순환의 일부에 분배가 있는거고
순환의 전체흐름에 있어서 경제적 정의를 논하자는 거다.

존재는 순환 또는 소용돌이라 1부에서 말하였고
인간사회 역시 존재하며, 순환의 에너지가 있다는것이고
경제적 완전한 정의란 이의 완전한 순환이라는 걸로 봐도 된다는 거다.
꼭 경제만이 아니어도 정치의 화폐라는 민의도 마찬가지.

인체로 봐도 피와 공기와 영양이 돌지 않는 장기는 문제인데
인체 장기에 해를 주면서 자기 장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체계가 있다면
그것은 기생충이나 병원체라는 것으로 봐야 하며
이런 존재는 완전흐름을 찾아가는 정의의 정의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현재흐름을 막아서는 존재를 해결하는 질병의 차원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그나마 낫다.

경제순환에 있어서 유명하고 큰 오류로 낙수효과라는게 있다.
경제라는 생태계에 위에서 물을 뿌리면 밑으로 내려간다는건데,
이거 너무나도 간단하고도 멍청한 오류가 아닌가.

물은 꽃에 주는게 아니라, 땅에 주는 것이다.
거름은 꽃에 주는게 아니라, 땅에 주는 것이다.
물거름을 꽃에다가 주는 멍청이가 어디에 있나?
그럼 꽃이 거름먹고 썩는거고, 꽃에 물방울 맺히는건 사진촬영용이지 물먹여주는게 아니다.
이미 꽃은 땅으로부터 뿌리로 줄기로 가지로 잎으로 해서 물을 먹는 통로가 이미 있다.
그렇다면 물과 거름은 당연히 땅에 줘야 그게 바른 순환이 아닌가?
그걸 꽃에다가 직접 준다는건 질병을 직접 만들어 주겠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고 공기와 햇볕도 땅에 모두 줘야한다는것도 오류다
그건 잎에 주는게 맞는거고)

그럼 순환계 질병론으로 경제정의가 모두 해결될까?
명현현상이라는 단계는 질병일까? 아닐까?
또는 경제를 단순히 정의의 차원으로 접근된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될까?

순환을 들먹인다면, 생태계 약육강식의 구조를 인간사회에 빗대 들먹이며
이것이 생태계 순환이며, 고로 약육강식 이것이 정의의 일부이다 라고 말한다면
반문할 수 있는가?

인간기준 순수 정의론으로 접근한다면,
앞서 누누히 살펴왔던봐와 같이 불완전 그자체가 존재의 전체로 귀결되며
이는 불완전 그 자체의 인정이라는 것으로 쉽게 편향되며
이는 오히려 면죄를 줄 수 있는 근간으로 오용된다.

순환계 질병론이든, 순수 정의론이든
모든 존재가 불완전인데, 내가 그 불완전 일부를 하겠다는데
무슨 불만이냐고 해버리면 그게 먹힌다는거다.

그럼 정의를 찾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범주의 문제라고 본다.

인간, 인간사회라는 에너지체를 보자
그리고 인간사회가 속한 시공간적 환경을 모두 보자.

인간범주에서
우리가 숨쉬는데 의식하지 못하고, 피가 도는걸 의식하지 못한다.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인간사회 범주에서도
문제가 있다는게 느껴지지 못할 정도의 순환구조를 만들어 내어야만
정의가 구축되었다고 봐야한다.

그 순환중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질병/기생충으로 보고 대응/제거해야 하는거다.
그 순환중에 일시적 고통이 있지만 결국 해소되는 거라면 치료의 일환으로 봐야한다는거다.
문제가 있다는것에 면죄부나 나아감에 대한 방해로 인간기준 정의론이 오용되어서는 안된다.

생태계적으로도 강력한 맹수가 없어지면 아예 망가지는가?
아니다. 국내에 호랑이가 없어서 맷돼지가 넘치니 호랑이를 산에다 풀어야 하는건가?
아니다. 점점 그렇게 보다 나은 다른 궤로의 이행이 진행되고 있는것이다.

약육강식론의 오류는 바로 잘못된 범주의 선정과 정의론 오용에서 오는 오류이다.
면죄를 먼저 찾고, 거기에만 맞는 범주와 정의를 찾아 정한 오류인 것이다.
90, 9, 0.9, 0.0009 으로 문제의 크기를 줄여가는 것이
정의를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지
불완전에 대한 존재론을 찾아내 현재 불완전 흐름자체를 인정하는게 정의가 아니다.
그건 잘못된 소용돌이에 빠지는 것이다.

정의를 정의로 해결하려는 오류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더 나가보자. 인간사회 자체만의 선순환이 오로지 정의가 아님을
이미 환경문제라는 것으로 인지하고 있지 않던가
마찬가지이다. 이 지구라는 구조내의 순환구조를 더 좋게하는게 정의라고 본다.

지구라는 환경이 변화될때,
인간사회는 고통적인 구조변화를 겪게 된다.
그럼 이건 정의인가 아닌가?

또 착각하지 말자.
원래그래 라는 단편적인 정의를 따지는게 정의가 아니라
환경범주라면 그렇지 라는 범주기준 정의가 아니라
환경변화에 따라 나타난 질병과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정의다.
그리고 애당초 모든 존재자체가 그런 이행의 책임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 확대해보자
모든 존재의 순환구조를 완전 존재로서 나아가게 하는게 정의이다.
모든 순환구조의 문제점을 어쩔수 없다고 인정하는게 정의가 아니다.

고로, 정의에 대한 범주문제에 있어서,
범주를 정하고 정의를 찾고자 한다면 범주오류를 발생시켜서는 안되며,
진정한 정의를 찾고자 한다면 범주가 끼어들어서는 안된다.

결론은 뻔한 문답이다.

문 :
"정의란"

해 :
"인간범주로 정의를 정의하려는 행위는 인간에 면죄부만 주는 편향이 쉽게 발생된다."
"인간도, 비인간도, 환경도, 양자도, 우주도 완전함으로의 이행이 원칙이다."
"완벽한 완전함이란 작용없을 정도의 순환이고 이를 위한 이행이 더 나은 순환이다."
"존재란 현재순환 또는 소용돌이이고, 정의란 더 나은 순환으로의 이행이다."
"부작용 구조의 지속은 순환이 아니라 아니라 더 나은 순환을 역행하는 소용돌이로 질병이다."

답 :
"더 나은 순환이 정의이다. 인간뿐 아니라"
"경제정의 문제는 단편적 정의론이 아니라 인간사회 질병론으로 접근해야 한다."



2.4 민주주의는 영원한가


--> 경제사회범주론 정의오류가 정치사회범주론 정의오류로 넘어왔다.

"로마식 민주주의의 비극"
"인공지능 시대에 민주주의가 존재할까."

본문에서 나온 민주주의 논제들인데,
모두 같은 문제들을 가진다.

정치적 구성원/장치/형식/단체가 모두 범주의 오류를 이미 가지고 있다.

이미 오류가 있는데
로마 구성원의 범주가 변경되면서 오류가 더욱 크게 발생되었고
이 오류를 줄이고자 하는 개념이 없어서 발생된 문제였다.

환경/기술의 변화가 오면 정치개념 범주의 오류를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하는데
그 오류를 인지하지 못하고 변화만 맞이 하기 때문에 오류가 폭발해서 오는 문제들이다.

현재 각 나라에서 행해지는 민주주의 역시 범주의 오류를 모두 내포하는 문제가 있고
(투표대상/간접투표/정당정치등 모두 범주의 오류를 이미 가지고 있다)
이 문제들이 구성/기술/환경의 변화에 따라 더 발전되는 형태가 아니라
더 악화되는 형태로 가려고 하는 소용돌이를 제거하지 못하는 문제도 가지고 있다.

민주주의 제도상의 각 정치적 범주오류들을 지속적으로 해결해야한다.
본문에서 말하는 기술이 바로 해결방법이라고 본다.
투표대상 역시 학문의 발달로 투표연령과 사람이 넓어지는 것이며,
간접투표 역시 기술의 부족으로 있던거지 기술발달로 직접투표로 바뀌어야 하며,
정당정치 역시 간접투표와 마찬가지로 기술발달로 대체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당정치는 직접투표가 주는 새로운 오류를 보완해주는 것으로 대체될 것으로 본다.

인공지능 시대나 로봇 노동자 시대라 하더래도
그 모든 기술은 정치적 범주오류를 줄이는데 써야 하는것이지
범주오류를 넓히는데 쓴다면 그게 바로 민주주의의 소멸로 가는길을 의미한다.

즉, 기술이 발달되서 소멸되는게 아니라
기술을 안써서, 잘못써서 소멸되는 것이다.
기술을 정치범주오류를 줄이는데 안써서 말이다.



"법들이 중요성에 따라 유효기간을 두고 갱신하도록 하자."

본문에 나오는 법제의 문제성 해결법인데
법기술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다.
허나 그 갱신 역시 특정 정치범주에 유리하게끔하는 정치적 기술이 존재할 수 있다.
그것 때문에 악법이 남겨지고 있지 않는가.

근원적으로
그 법률이 미쳤던 범주의 변화에 즉각 대응되어야 한다는 헌법/헌법기관이 존재하면 된다고 본다.
그것을 통해 법 자체가 범주오류를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법문을 만드는게 입법기관이 해야하는 일이지만, 그들 자체도 정치적 범주오류를 가지고 있다.
즉, 법문상 범주오류를 줄이는 일 자체가 범주오류를 가진 개체의 판단을 거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별도의 기관이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법문의 범주를 판단하는게 사법기관의 일이기도 하지만
법문이 범주오류에 걸리면 사법적 판단으로 해결하는게 아니라
별도기관의 범주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즉, 입법/사법/행정 외에 범주정의기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언가를 정의했는데, 그 정의가 모두 법률인가? 아니다.
법은 정의를 이용한 정의의 구현을 위한 도구이지, 정의자체가 아니다.
법문상 정의가 범주오류가 일어났다면,
정치적 범주오류가 최소화될 단체가 즉각 그 오류를 바로 수정해야 하는거지
정치적 범주오류를 가진 단체들이 이해관계로 범주를 해석하고 새로 정의한다는건 맞지 않다.

고로, 범주정의기관, 줄여서 정의기관이 필요하다.
평면적 삼각형의 3권분립이 아니라
입체적 사면체의 4각분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입-사-행의 공무 3권분립면외에
입-사-정의 법률 3권분립면과
사-행-정의 집행 3권분립면과
행-입-정의 수립 3권분립면을 추가한
4각분할이 필요하다고 본다.

각기관은 4년주기로 해마다 한 4각기관의 전국/지방단위 수장과 의원을 국민투표로 뽑는것이다.
현재의 어정쩡한 3권분립이 아닌
4각분할에 의한 상호보완의 구조가 더 탄탄한 구조를 가진다고 본다.

그렇다면,
오류가 없는 정치범주단체는 무엇인가?
국민 또는 인류라는 범주가 그나마 적다.
더 나가면 생명체라는 범주도 있겠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불가하니
지금으로서는 교육단체가 맡아야 하는게 타당하다고 본다.
교육계도 국민투표를 하고 있으니 확대수용도 쉽다.
물론 그 범주자체도 지속적으로 정의되어야 한다.
지속적으로 변함으로.


정리하자.
너무 간단한 문답이다.

문 :
"민주주의는 영원할건가"

해 :
"전체주의는 정치범주오류를 너무나 크게 가지는 정치구조이고,
민주주의는 정치범주오류를 그나마 적게 가지는 정치구조이지 없는 구조가 아니다.
이게 민주주의 정치구조 문제의 시작점이고 해결점이다."
"범주오류의 문제는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지속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범주오류를 범주오류단체에 맡기는게 아니라, 정의단체에 맡겨야 한다."

답 :
"구성/기술/환경의 발전을 정치범주오류를 줄이는데 쓴다면 민주주의는 발전된다."
"범주전담 정의단체로 3권분립에서 4각분할로 전환이 필요하다."

 
2.5 로마는 정말 멸망했는가


--> 이게 왜 빅 퀘스쳔인지 그게 퀘스쳔이다.

거대제국의 멸망보다
거대제국은 인류에게 무엇을 주는가 라는 주제가 더 좋아보인다.

그리고 정의하고 무슨 상관이지.
그런다고 포기하기는 그렇고 거대제국과 인간의 정의를 함 찾아보자.

앞서 챕터에서 민주주의의 소멸이 좀 나와서
민주주의 인간사회를 거대제국-국가와 물려서 정의를 함 찾아보도록 한다.

민주주의라는 사회제도에 대해서, 그 발전-발달과 소멸-수렴요소는 무엇일까?
발전/소멸이 가지는 긍정/부정적 의미가 오류를 줄수있어 발달/수렴이라는 단어로 바꿔본다.
다음의 4가지 힘의 요인이 있다고 주장한다.
지적사기성 서술이라 할수 있는데, 비유로 자연계 4가지 힘에 빗대어 서술해보자.

힘 : 요인
수렴요소 : 제도를 수렴시키는 소용돌이/순환 흐름/상태
발달요소 : 제도의 발달시키는 소용돌이/순환 흐름/상태

1. 중력 : 인구
수렴요소 : 많은 인구수, 간접민주주의 비율이 높아진다.
발달요소 : 적은 인구수, 직접민주주의 비율이 높아진다.

2. 전자기력 : 기술
수렴요소 : 기술발달 미비, 통신/이동/도구의 미비로 간접민주주의 비율을 높인다.
발달요소 : 기술문명 발달, 통신/이동/도구의 발달로 직접민주주의 비율을 높인다.

3. 강력 : 사건
수렴요소 : 유지집단, 기득권 유지를 위해 강력통제, 언론/교육 수렴유지(왜곡).
발달요소 : 타파집단, 기득권 타파를 위해 봉기/혁명 발발. 사회변화분출(분화).

4. 약력 : 문화
수렴요소 : 수긍집단, 흐름에 수긍하고 산다.
발달요소 : 희망집단, 흐름에 조금씩 나아간다.

민주주의만 사회제도냐 라고도 말할 수 있다.
허나 지구상의 부족국가든 왕정국가든 입헌군주제든 대통령제든 모두 민의기반이라고 볼 수 있으며
단지 그 민의를 실현하는 방식이 저 4가지가 섞여 부족/왕정/입헌군주/대통령 제도가 나온거라고 본다.
제도가 나와서 사회에 적용된게 아니라, 4가지의 변화 때문에 거기에 맞는 제도가 나오게 된거라는 것이다.
머 꼭 4가지만이 아닐수 있다. 4대힘에 빗대어 서술해본다는 것 자체가 오류를 내포하니까.

로마라는 제국이 주는건, 저 4대요소가 아주 드라마틱하게 춤췄을거라고 본다.
꼭 로마가 아니더래도 제국이라고 칭해졌던 국가들은 4대요소의 아주 훌륭한 모델인 것이다.
제국의 흥망에는 위 4가지중 발달기능간 상호작용이 발달요소가 강한시기면 흥해갔다고 보고
저해기능이 강한시기에 망해갔다고 본다. 물론 현대국가에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그 출렁임이 작아도.

주제랑 무관해도
어케든 문답 내보자

문 :
"국가의 정치제도가 흥망에 영향을 주는가?"
"제도의 정의는 무엇인가?"

해 :
"국가의 제도는 구성원의 요인에 따라서 만들어 지는거지 제도를 만들고 구성원을 맞추는게 아니다."
"구성원을 제도에 맞추려는 강력요소와 약력요소가 있긴 하지만, 그건 제도가 아니라 기득권이다."
"제도는 구성원의 변화에 따라 제기되고 변화된다. 그러다 국가가 없어지고도 하고 생기기도 하는것이다."
"인구와 영토의 증감과 기술과 문화의 발달이 제도의 변화를 주는 요인이며 이 변화가 인류의 역사이다."
"더디어 보이지만 꾸준히 나아짐으로 진행되는 인류역사는 근본흐름에 맞게 나아가고 있다."
"유지집단 강력 수렴기술이 '지연' - 더딤이다. 완벽한 유지가 안됨을 그들도 이미 알고 있다."
"이 '지연'의 부수물로 '수긍'을 이끌어 낸다. 이게 유지집단 그들의 기술이다."
"다르게 말하면 물의 흐름에 소용돌이가 생겨 만들어진 지연자체가 그들 유지집단이다."
"즉 유지집단은 흐름지연으로부터 만들어진다. 존재의 발생이 그러하듯이. 그래서 지연하고 싶어한다."
"당장 인간이 영생을 바라지 않는가? 맞다 지연하고 싶어한다. 그렇다고 무조건 빨리 죽어야 하나?"
"보다 바른 흐름으로의 전이가 정의이다. 그게 지연이든 소멸이든."
"흔히 지연세력이 너무 강해지면 그걸 수구라고 부른다."

답 :
"국가 구성의 변화에 맞게 정치제도가 변화되는 것이다. 수용못하면 국가가 깨지게 된다."
"구성원 역시 그 흐름의 소용돌이- 지연 때문에 발생된 대상이고, 제도에 영향을 미친다."
"보다 나은 제도로 꾸준히 변화해 가는게 인류사회적 정의이다."



2.6 왜 서양이 세계를 지배하는가


--> 지구크기에 맞는 기술문명시기의 먹이감이 원인이다.

배아에서 세포가 발달되는 것에는 주변환경과 주변세포와 시기덕분에 자신의 위치에 맞는 세포가 발달된다.
문명역시 주변문명과 주변환경과 시기덕분에 발달되는 것이다.

안정화 시기의 균집단체는 안정된 균집단체와 만나면 정체되며
확장 시기의 균집단체의 발달 역시 적합한 환경에 영향받는다.

서양문명은 이집트/아랍/아시아 문명과의 교류 덕분에 발달되었고,
로마이후 중세시대 수립된 각유럽국가라는 밸런스 분할에 의한 안정기에 들어 정체되었다.
북아프리카/아랍 문명은 서양보다 먼저 발달되었으나 그 기후적 변화로 인하여 정체되었다.
몽골이후 오스만제국으로 통합되고 유럽과 접경을 두고 정체되었다.
동아시아 또한 고대문명이후 유럽국가 밸런스 분할처럼 동아시아간 정체에 들어갔다.
남아시아 역시 마찬가지이고
아메리카는 늦게 이주된 덕분에 늦은 고대문명이 발달되었다.

여기에 각 문명간 교류로 기술이 점진적으로 발달된다.
이 기술발달은 균집단체의 확장력의 발달이고,
이 확장력으로 대치상황이 아닌 다른곳의 확장을 가능하게 해준다.

기술발달로 인해 인류라는 균체의 확장력의 시기에
유럽/아랍/동아시아 모두 대립이 없는 곳으로 확장을 시도 했고
이때 성공적인 확장을 한게 유럽이었다.
기후 때문에 약화된 아프리카와 늦은 고대문명을 가지게된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와의 직접 교역에 성공 바로 그것이다.

서양이 지배하는 이유는 그 기술적 발달시기가,
소위 대항해시대라는 그 시기에 지구 절반에 확장에 성공하고
지구 전체에 연결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양분을 섭취한 덕분에,
지구를 한바퀴 먼저 돌았기 때문에
현재 기술상 아시아를 이기게 된것

그렇다면 몽고는 왜?

육지국가였기 때문이다.
지구가 반지의 제왕 중간대륙이 생기기 전처럼 하나의 대륙이었다면 모르겠다 그들이 지배했을지도
허나 지구는 바다로 모두 연결되어 있다.
고로 전 지구를 돌 수 있는 최초의 기술은 배이다.
몽고는 대륙을 지배했지만 지구를 지배하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아프리카/아메리카/아시아는 유럽보다 훨씬 그 바탕이 넓고
유럽은 과거의 영광과 발달된 사회구조로 유지하고 있다.

과거와 마찬가지다.
지구를 새로운 배로 한바퀴 먼저 돌린 곳이 지배할 것이다.
찌질한 국가에서 아메리카의 양분을 듬뿍먹고, 유럽과 아시아의 양분도 먹은
지구를 비행기라는 배로 한바퀴 먼저 돌린곳이 결국 지난 세기를 지배하지 않았던가

그 새로운 배가 무언지는 새로운 기술문명이 알려줄 것이다.
말과 자동차는 가장 대중적인 새로운 기술이지만, 지구를 지배한 새로운 배가 아니었다.
어떤 기술인지 몰라도 그것은 지구를 순식간에 한바퀴 돌거라고 본다.

새로운 배/비행기인 우주선 일지도 모른다. 몇시간이 순식간이라면.
아 이미 인터넷이 광속으로 돌고 있던가.
그렇다면 그 인터넷으로 지구를 한바퀴 도는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정의단체의 정의라든지.

이렇게라도 해야 정의랑 연결되나..
서양이랑 정의랑 무슨 연관인지 모르겠다.


2.7 인간은 왜 유명해지고 싶어 하는가


--> 인간은 왜 이름을 짓는가?

이 주제라면 더 좋겠는데, 그래도 상통하는 내용이라 본다.

이름지음, 유명해짐, 유명인숭배가 동일선상에서 논의되는게 아쉽긴 하지만
이름지음으로 인식화 해결, 이름남김으로 인지화 해결, 숭배함으로 동일화 해결은
모두 인간 시뮬레이션 데이터 생성방식의 문제로 귀결시켜 본다.

시뮬레이션 객체모델 데이터를 우주적으로 만드는 방법으로서 신적 명칭 정의
시뮬레이션 주체모델 데이터를 적극적으로 만드는 방법으로서 스스로 유명인 되기
시뮬레이션 주체모델 데이터를 소극적으로 만드는 방법으로서 유명인 동기화 되기
시뮬레이션 모델 데이터를 ......

이와 같이 인간 시뮬레이션 데이터 작용방식중 생성에 대한 논리로 치환해도
좋다고 본다.

따로 문답을 적어야할건 아니라고 본다.
꼭 모든 인간이, 존재가 유명해지고 싶어하지는 않으니까.

그리고 이 정의는 정의이지 정의는 아닌데..


2.8 우리는 누구인가


--> 인간의 범주라는데 범주를 정의해 볼까나.

나의 정체성에서 시작되어 국가,민족 정체성으로 본문에서 서술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범주 자체가 더 중요한 질문이지 않을까 한다.
범주를 살펴보는걸로 하자.

생물학적 인간, 정신적 인간, 사회적 인간 어느것이 인간일까?
이 분류역시 너무 인간중심의 단편적인 사고에 지나지 않는다.
범주라는게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것도 당연하다.


커리를 보자.
커리의 노란색이 내눈에 들어왔다.
커리의 냄새가 퍼져 날파리의 후각기관을 건들였다.
(커리가 날파리의 시각은 건들였는지 후각을 건드렸는지는 몰겠다.)
커리를 먹는 내앞에 커리에 취한 날파리가 날아다닌다.


자 어디까지가 커리인가?
나는 커리를 먹으니 커리와 융합하였는가?
내가 커리를 봤으니, 파리는 커리를 맡았으니 융합하였는가?
커리와 나와 날파리는 커리를 매개체로 연결된건가? 융합하였는가?


나-인간의 인지체계만 인정하겠다면 커리의 실제범주는 무의미한가?
생물체의 인지체계로 인정하겠다면 날파리의 인지범주도 유의미한가?
무생물의 실존범주로 인정하겠다면, 나와 날파리는 커리의 범주에 포함되는가?


범주라는게 정의가 되긴 하는건가?

자연수가 실수의 일부를 정의하는것과, 범주가 실존의 일부를 정의하는건 동일한가?
결국 범주란 커리처럼 담겼다 퍼뜨려지는 것과 같은가
자연수나 의미라는 오래된 범주는 묵힌 된장처럼 오래 담겼을 뿐


요리전 커리와 먹힌후 커리도 커리인가?
과거의 재질과 미래의 상태는 범주에 포함되는가?
어릴때 나와 성인의 나와 노인의 나는 DNA가 같으니 같은 범주인가?
그럼 여태껏 흩날렸던 비듬과 때는 나인가?


배식전 커리와, 배식판에 담긴 커리와, 숟가락으로 뜬 커리와, 입에 담은 커리는
모두 커리인가?
학교에서 나와 회사에서 나와 국민으로 나와 민족으로 나는 모두 나인가?


물은 h2o 뿐이아니라 물속의 수많은 무기질을 포괄하기도 한다.
범주를 어떤 집합이라 정한다면 모든건 범주이다.
집합의 집합은 문제가 아니다. 집합된다는게 그게 무슨문제인가.
단지 범주의 이름이 문제이다. 이름짓지 못하면 인식하기 어렵다고
고로 이름을 딱 짓고는, 짓는 순간 범주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인간의 범주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라는 단어가 문제이다.
범주자체만 놓고 고민했다면 인간이라는 명찰이 큰 문제는 아니겠지만
인간이라는 명칭을 정해놓고 범주를 찾고자 하니 완전규정이 불가능해진다.




문 :
"인간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해 :
"어떤 명칭에 실존을 모두 포괄한 완벽한 범주는 불가능하다."
"그 본질(커리)이 있고, 작용(색,맛,향)이 있고, 변용(요리)이 있고, 형태(그릇)가 있다.
이를 모두 포괄해야 어느정도 범주표현은 가능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나의 본질(DNA)이 있고, 작용(외형,목소리,발냄새), 변용(성장), 형태(학생,회사원,국민)
이 모든게 포괄해야 범주표현이 가능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이름짓고 대상을 찾겠다면, 계속 찾아야 한다. 계속 늘어난다."
"이름의 범주는 성질이든 작용이든 형태든 변용이든 계속 늘어난다."
"발견된 집합에 이름을 짓겠다면, 이름 때문에 집합이 훼손되지 않게끔 해야한다."
"집합은 집합이고, 이름은 이름이다. 동치되서는 안된다."

답 :
"인간의 범주는 무엇인가?"
"범주가 있고, 인간이라는 이름은 그 범주와 동치되지 않는다."
"이름은 짓는 순간 범주오류가 발생된다."
"이름으로 범주를 발생시켰다면 끊임없이 그 범주오류를 줄이도록 해야한다."
"존재가 발생되면 끊임없이 보다 나은 흐름으로 나아가는 것과 동일하다."





2.9 소유란 무엇인가


--> 인간의 소유라는데 소유를 정의해볼까나.

근데 본문에서는 일종의 분배 문제로 서술되고 있다.
2장이 정의이니 소유에 대한 정의를 분배로 본듯하다.
분배는 이미 말을 했었고 전체 순환으로 봐야 한다고 했었다.

소유 자체에 집중했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운 챕터라 버리기 아깝고,
소유 역시 분배처럼 순환내에서 봐야 하는건 마찬가지이고
이 또한 정의 문제를 가지고 있으니,
그럼 사회범주 정의로서 소유와 인간범주 정의로서 소유와 무범주 정의로서 소유를 통해
정의문제를 살펴본다.

참고로,
정의와 정의가 다른 의미인데 같이 표기되니 좀 헷갈리는데
문맥기준으로 판단바란다.


사회범주 소유 = 공유

공유에 대해서 말해보자.
공공기관, 공적자금, 공공xx, 이 모든건 누구의 소유인가?
근래들어 공공이 법인화되어 특정 소유체로 규정짓는 행위가 급증하였는데
그렇다면 공공법인의 소유가 맞는가? 왜 그런가?

어떤 가문, 문중이 있다고 하자.
그들의 선산은 문중의 소유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문중의 소유기관/소유자들이 그 선산의 소유자인가?

어떤 학교나 회사의 동아리에 공유기물을 구매했다고 하자.
그럼 이 기물은 누구의 소유인가?

답을 내기전에
그렇다면 소유를 하게되면 어떻게 되는걸까?
내가 또는 우리가 맘대로 부셔먹어도, 해쳐먹어도 되는게 소유인가?

동아리 공유기물을, 문중의 선산을, 공공법인의 자산을
누군가 또는 어떤집단이 팔아먹었다면,
그 의사결정의 정당성이 어떠하든
그건 소유되었던 거니 의사결정에 따라 팔린다는 행위가 과연 타당한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혹시 잘못된 편견이 아닌가?

다른 각도에서 사회소유 문제를 보자

자유자본과 사회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바라보는 소유는 다른가? 같은가?
소유자체에 대한 개념이 다른가? 아니다 그건 같다고 본다. 소유에 대한 부정/긍정의 차이가 있을뿐.
여기서는 그 부정/긍정을 꼭 안따져봐도 되겠다. 지난세기에 걸쳐 충분히 논쟁되었으니.

그럼 공유개념이 다른가? 아니다 그것도 같다.
공유개념이 달라 발생한 사상대립이 아닌가? 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공유개념 자체는 같다.

자유자본의 공유는 자유자본가들의 합리적 이해 때문에 발생되는 공유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유도 자유자본의 자본비율처럼 소유비율을 상정한다는 공유이다.
즉, 각자의 소유가 모여 공유를 만든다.
그리고는 이게 최종적으로는 공리로 처리된다.
자유주의의 기반의 공리주의에 있어
그들의 공유에 대한 가치판단은 공유 소유자들의 이익, 즉 공리라 할수 있으며,
그들의 공유의 범주는 공유 소유자의 집합이다.

사회자본의 공유는 공리적 개념으로 시작된 공리가치를 사리가치보다 높인 배경하의 공유이다.
사회의 소유로서 공유가 있고,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있고 또 그들의 각자소유가 있는것이다.
공유는 사회의 소유로, 사유는 개인의 소유로 분리해 보는것이다.
그들의 공유의 범주는 사회라는 집합이다.

공산주의의 공유는 사유를 제외한 공유이다.
물론 현재 공산국가들이 그렇게 되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론상 모든 것이 공유이다.
그들의 공유의 범주는 전체라는 집합이다.

자 그렇다면 왜 그들의 공유가 같다고 말하는가?
여기서 공리와 공유는 헷갈리지 말아야 한다. 공리를 논하는것은 아니니깐.
공리는 다음 챕터에서 논한다.

그들의 공유가 같은 이유는
개인집합=사회집합=전체집합이기 때문이다.
즉, 같다. 공유에 대해서.
어떤 사상을 가졌던 간에
모두 집합이라는 범주의 소유를 말한다.

그 집합이 다르지 않냐..라고 말할려고 하는가?
바로 그게 오류이다.
각 사상 모두 그 범주오류를 범하고 있다.
저걸 다르다고 말하는 순간 그것이 바로 공유의 범주오류이다.
즉, 각 사상의 공유 개념이 다른게 아니라,
각 사상의 공유 범주오류가 다른거다.

게다가 모두
공유자체에 대한 인식오류마저 발생하고 있다.
공유를 이익에 대한 집합으로 본 오류이다.
공유는 책임에 대한 집합이지 이익에 대한 집합이 아니다.
그게 공유인데, 이익관계로 공유를 바라보니
공리,사리 관계가 나오고
공유체에 대한 소유비율이 나오고
그런것 덕분에 사상이 분열된 것이다.

공유와 사유간의 우위관계정립이 다른게 아니냐 라고 말하겠지만
그건 공리와 사리의 관계정립이다. 공유/사유가 아니라.
공유 == 사유의 동급이 아니라 공리 == 사리의 동급이고
공유 >>사유의 비교우의가 아니라 공리 >> 사리의 비교우의이고
공유(사유=0) 의 절대가치가 아니라 공리(사리=0)의 절대가치이다.

공유와 공리의 헷갈림.
그게 바로 지난세기의 문제점이다.
단어하나 헷갈려서.
공산주의가 변질된 이유도 그것이고
사회주의가 비실된 이유도 그것이고
신자유주의 병폐의 원인도 그것이다.

공유는 공리가 아닌데, 그걸 동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유는 사리가 아닌데, 그걸 동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공리/사리가 아니면 무엇인가?
공유는 공책이고, 사유는 사책이다.
그걸 공리/사리로 착각한 이유는
인간의 소유개념을 착각하기 때문에 발생된다.

소유의 착각은 아래서 다시 보고,
자 돌아가서, 동아리/문중/공공기관에 대한 공유의 개념이
자유자본/사회자본/공산주의에 입각하여 모두 다른가? 같다. 다를게 없지 않는가.
모두 공리가 아닌 공책에 입각한 공유이다.
원래 그것들은 어떤 대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생겨난 조직이 아닌가?
그들이 이익을 내려고 한다는것 역시 책임을 보조하기 위한 부수적인게 아닌가?

그렇담 아예 이익집단인 회사나 국민모두의 이익이 고민인 국가로 따지면 다르다고 할지 모른다.
여기서도 공유에 대한 공리와 공책의 구별이 필요하다
이익집단이란 이익이라는 공유물에 대한 책임집단이다.
이익집단의 이익발생에도 이익분배에도 책임이 있는 집단이다.
이익집단의 이익자체가 바로 공유물이기 때문이다.
이 이익발생과 분배에 대한 공책이 회사와 사회를 구성하지, 이익에 대한 공리로 구성되는게 아니다.
공리 또는 사리 추구로 이익 발생/배분의 공책 또는 사책을 호도해버린게 문제점 아닌가?

아니, 돈벌자고 모인 회사인데 웬 책임만 있냐고 따지고 싶을것이다.
주주가 투자해 설립하고 임직원이 이익발생 책임이 있고,
이익결과에 대해서 주주가 배당하고, 임직원은 계약관계로 이익을 가져간다는데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말하고 싶을거다.

그건 공유에 대한 오류에 기인한 인식이라고 말하는거다.
이익자체가 회사의 공유이다.
국익자체가 국가의 공유이다.
이익이라는 단어때문에 공책추구가 아닌 공리추구로 쉽게 착각하는데 그래서는 안된다.
이익에 대한 공리와 사리의 우선순위문제 해결만을 계속 따지는데 그래서는 안된다.

그럼 무슨 책임이냐?
1장에서 말해온 존재의 존속가치를 위한 올바른 존속을 위한 책임이다.
즉, 이익발생에 있어서 올바른 책임과, 이익분배에 있어서 올바른 책임이 있다는거다.
그게 회사라는 단체의 성립사유이고, 그게 국가라는 구조의 성립사유이다.

허나, 이게 자꾸 왜곡되어서
이익추구의 공리/사리와 이익분배에 있어 공리/사리만 따지고 있다는게 문제라는거다.
공리가 옳냐 사리가 옳냐를 따지는게 정의라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공유물 자체가 이익이라고 해서 그렇게도 햇갈려야 하는가?

이해는 한다.
이익이라는 것중 가장 대표적인게 음식이라고 "치환"될 수 있는데
그게 생존이라는 것과 직결되니깐
생존우선적 사고에 입각해 이익우선적 사고를 하게되는
생존에 얽메이는 생명체가 가지는 한계이니까 말이다.

허나 지적생명체가 헷갈리는건 지적생명체의 책임소홀이다.
이해해주자면 "치환" 이라는 속임수에 속은건데 언제까지 속고만 있을텐가..

그럼 왜 이런 지적생명체의 책임소홀이 발생됬는지
인간범주의 소유에 대해서 살펴보고 답을 찾아보자.


인간범주 소유 = 사유

인간범주의 소유는 생존과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직결되어 있다.
의식주라는 기초적인 소유물 자체가 생존 자체이다.
즉, 인간에게 있어서 소유는 생존을 위한 어떤것이 그 출발이다.

더 축소해서 인간 생명체 자체의 소유는 무엇인가?
그건 당연한 소유체로 생각되어지고 있다.
내머리카락,내손톱,내얼굴.. 당연히 내 소유가 아닌가?

가족이 생겼다.
부모가 있거나, 아이가 있다.
이는 내 소유인가? 아닌가?

그럼 정말 그러한가?
그럼 내 맘대로 처분해도 되는 대상들인가?

인간기준의 소유도 내가 그 존속을 책임져야할 대상을 말한다.
그를 위한 부수적인 또는 필수적인 대상들을 내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게 인간의 소유이고 인간의 착각이다.

본인의 몸은 본인의 자유로 움직이는 소유물인가?
아니다. 본인의 생존을 책임져야 할 대상체인 것이다.
유교에서는 아예 부모로부터 받은것이니 불감훼손하라고 하지 않던가.

내앞의 밥상과 내옷과 내방,내집은 그냥 내것인가?
아니다.
내몸의 책임을 위해 있는 밥상이고,
내몸의 책임을 위해 있는 옷이고 집이다.

밥먹어라 또는 먹지말고 다이어트해라는 다
몸의 책임을 위한 것이지 몸의 자유나 이익을 위한것이 아니다.

자유와 이익은 책임을 위한 도구이다.
때때로 자유와 이익이 제한받는건 책임 때문이다.
누군가의 이익 때문에 자유와 이익을 제한했다면 그건 오류이다.
이익이 책임이라는 착각은 너무 쉽게 범하는 범주오류이기 때문이다.

이 범주오류가 주는 파장이 너무 크다.
인간기준의 이 오류가 사회기준의 오류로도 너무나 쉽게 번져버리는데,
현재사회구조에서 제공되는 이익=화폐=의식주라는 이 "치환"개념이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 책임을 다 한것이라는 오류를 주기 때문이다.
요샌 하나 더 나가서 유한계급의 여가를 즐겨주는 것도 책임을 다 한것이라는 오류가 더해졌다.

유한계급/노동계급, 왕족/귀족/농노등의 계급구분이 나오는것도
이 범주오류가 수천년이 흘러버리니 고착화된-지연된 소용돌이이다.
현대 경제학도 이 범주오류를 그냥 인정만 하고 있지 않던가.
계급이 있으니 타파하자, 계급간 흐름을 어떻게 해보자.
타파해보자는 시도자체를 폄하하지는 않는다.
단지 왜 오류가 생겨났는지 그 근원을 찾아 바로잡자는게 아니라,
이미 생긴거 어떻게 잘 해보자라는 개념의 접근이라는게 아쉽다는거다.

책임의 도구로서 이익이고, 이익의 수단으로서 소유가 아니라,
소유가 이익이고, 이익을 추구하는게 책임을 다했다는 그게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소용돌이 흐름을 본 훌륭한 눈들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해협과 암초라는 지연물을 해석하는게 아니라
소용돌이를 해쳐나가는 분배라는 항해기술에 집중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해보자면,
사유에 대해 보수적/진보적 사상을 살펴보는 것보다
사유의 불평등 그 자체를 살펴보자는 건데
존재 자체는 불완전, 즉 원래 불평등한 존재한다고 했으니
불평등은 원래그래! 라고 결론 내릴수 있을수도 있는데
그것도 착각이다.

인간이 배치된 환경 자체가 완전평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출발 자체에 불평등이 내재되어 있는것은 맞다.
허나 그 불평등에 고착화-지연화 하는게 존재의 진정한 흐름이 맞는가?
아니다. 그런 고착화는 올바르지 않는 흐름 - 지연일 뿐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존재가 가치있으려면 새로운 올바름으로의 지속적인 이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럼 인간이 배치된 이 불완전한, 불평등한 환경자체를 어떻게 해야하는데?
환경의 불완정성/불평등성의 인지와, 거기에 대응하는 인간의 책임배치로 접근해야 한다.
인간의 이익배치나 이익배분으로 접근한다면 불평등과 불완전의 고착화-지연화가 계속 진행될 뿐이다.
그리고는 왜 이러지? 라는 탈출없는 개미지옥에 빠져들 뿐이고, 수긍집단이 되버리는 것이다.

불완전한 각 환경에 배치된 인간에겐 그 불완전성에 대응하기 위한 도구개발 책임이 있다.
이 도구는 기술/문명/문화라고 치환해도 된다.
보다 나은 환경에 있는 기술/문명/문화는 더 불완전한 환경에 있는 인간들의 책임을 위해
그 도구를 발전시킬 책임이 있는 것이고, 한 곳의 도구가 다른 곳의 책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도록
전파/발전시킬 책임도 있는것이다.
그게 인간의 책임이고, 그것들의 도구가 소유다.

나의 책임에는 나와 가족, 사회, 국가의 책임까지 포함되는 것이며, 그를 위한 도구들이 있으며,
그것들이 바로 나의 소유, 사유인 것이다.
내 배가 부르는게 소유가 아닌 것이다.

죽게 생겼는데 먼 개똥철학이냐고 할 수 있는데
맞는 말이다.
그건 죽게 생겼을 때에는 허용 되는 오류이다. 지연의 허용이다.
무조건 모두 빨리 죽어 없어져라는것만이 올바른 흐름 이행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물체의 존속 - 지연이 허용되게 되는 오류이다. 이 불완전 덕분에 존재가 발생되니까.

하지만 다같이 잘살아보자고 할 때에는 잡아야 할, 잡아가야 할 오류라는 것이다.
오류는 오류일 뿐 그게 정의가 아니다. 그거 잡는게 책임이다.


무범주 소유


그럼 인간이 아닌 것들의 소유는 무엇일가?
소유는 인간의 전용물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모든 소유는 존재 존속 가치를 위한 도구로서 존재하는 것이며
그게 동물이든 식물이든 미생물이든 그들의 존속책임을 위한 존재가 있으며 이들이 그들의 소유이다.

그렇다면 무생물의 소유는 무엇인가?
바위는 무얼 소유하고 있을까?
모래사장은 무얼 소유하고 있을까?
우주는 무얼 소유하고 있다고 해야 하나?

마찬가지이다.
모든 존재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이행해 가고 있으며
그 이행에 있어서의 상호작용 매개체가 모두 소유의 대상이다.

바위를 비와 바람이 깎아 모래로 돌려준다면
바위는 비와 바람과 모래를 소유하고 있는거다.




이번 문제에 대한 설이 너무 길었는데
아무래도 인간사회에 대한 논쟁들의 근간에 대한거라 그런가보다.
문답을 내보자.


문 :
"소유가 무언가?"

해 :
"존재는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이행해간다."
"새로운 올바른 완전으로 이행이 존재의 책임이다."
"책임을 위한 도구로서 이익이라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이익이 책임이라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 파장은 너무 크고 답도 못찾는다."

답 :
"올바른 완전으로 이행이라는 책임에 대한 상호작용의 총체가 소유이다."
"죽게 생겼을 때 생긴 소유에 대한 오류는 살만할 때 잡자."
"그럼 결국, 소유문제는 살만할 때라는 기준이 해결시점이라는걸까?"



2.10 가축은 인간의 포로인가



--> 인간의 범주를 생물계로 정의해 볼까나

음식의 문제라니,
음식에 의한 인간정의에 대해서 봐야하는건지
가축과 인간과의 정의에 대해서 봐야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생물계내로서 인간정의와 인간과 동식물 및 무기질을 포함한 바른정의로 나가보자.

과거 동양철학적 관점에서 천지인의 개념에서 인은
모든 생명체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우주삼라만상의 근원을 천지인으로 규정하는데
지/인의 구분이 물체중 인간과 인간아님으로 규정하지 않았다고 보기때문이다.
땅에서 나는거, 산에서 나는것으로 음식을 보았으니 지의 영역이 아니냐고 하겠지만
천/지/인을 시간/공간/생명으로 보는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가축/음식을 말하는데 왜 동양철학을 말하느냐고 할수 있는데
이 동양철학의 인의 개념에 가축/음식에 무생물까지도 포함된다는걸 말하고 있다.

3재중 인의 해석을 인간으로 해석하는게 더 많기는 하다.
허나 형/기/신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3재, 만물의 근원을 따진다는 걸로 볼땐
인의 대상은 아무리 줄여도 모든 생명체이지, 인간만이 아니라는걸 주장하는 바이다.
인의 대상을 늘리면 생태계까지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이 주장을 근거로
인-사람-삶이라는 것은
생명-생태계-물질의 그 순환 전반을 의미한다고 말하고자 한다.

그렇지 않는 시선, 사람과 사람아닌 생명/생태계를 분리하는 시선은
인간중심 인식오류일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인류로 범위제한 하려는 것은 범주오류인 것이다.

그럼으로
가축 또는 농사를 통한 안정적인 음식 생태계의 구축은 바로
불안정한 인간궤(계가 아니다)가 보다 안정적인 궤로 전환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바로 이것이 이전 챕터에서 말한
"살만할 때의 기준" 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즉,
구석기 수렵/채집 생활이 먹고살기힘든 죽게생겼을 때이고
신석기 농업/축산 생활이 먹고살만할 때라는 것이며
저 소유의 오류는 바로 신석기 시절에 잡았어야 하는 오류라는 것이다.
지적능력이 우주를 뛰어넘을 이 시기가 아니라.

다르게 말해
구석기 오류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게 현대문명인들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구석기 시절 살기 힘들때 소유오류보다
신석기 시절의 오류가 더 많았다고 본다.
구석기 소유오류는 인정할만 할 정도로 오류가 아닌 걸로 보였을거고
신석기 소유오류는 바로잡았어야 할 오류이기 때문에 점점 크게 느껴지는 것이다.

1만년전 신석기시절의 목축이나 농업에 의한 생산경제 시대는
소유라는 개념의 탄생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오히려
소유라는 오류를 못잡아서 노출된 계기라고 보는것이다.

그럼, 엄청난 잘못인걸까?
1만년이라는 시간이 길게 보이지만,
구석기 시절이 주는 그 시간에 비하면 아주 짧다.
아직 인간의 신체 자체는 여전히 구석기 체질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그 정신도 구석기 정신인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도 해줄까.

그런데,
그런 면죄부를
우주를 씹어드시는 절대이성을 추구하는 인간들에게는 주긴 어렵다.
아니 주어서는 안되는거 아닌가.

목축/음식과 소유문제는 여기까지만 보자.
구석기 정신은 빨리 잊어버리게.

돌아가서,
생태계로서의 인간은 어디까지가 인간일까?

간단하다고 본다.
생태계 자체가 인간이다.
지구상의 물과 공기와 영양의 순환이라는 생태계가 있고
그 중간점으로서 생명체라는 그릇-지연들이 있고
그 그릇들의 정점으로 인류라는 훌륭한 지연개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너무나도 잘 알다시피,
인류와 생태계는 분리되서 생각되어질 것도 아니고 그냥 하나인 것이다.
단지 환경에 따른 그 생태계의 형태가 다를뿐.

동양이든 서양이든 인간이라는 단어를 너무 인류에 집중해 인식한 오류가
현재의 환경문제등을 일으키는 오류의 주범이라는 것은
자세히 안따져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라고 본다.


문답을 보자

문 :
"인간은 무엇인가?"

해 :
"우주구성을 따지는 근원으로 볼때 인간은 모든 생명체라고 해야한다."
"생명체는 생명체만이 아닌 생태계로서 보아야 한다."
"순환구조내에서 일시적 그릇으로 존재하는게 생명체이다."

"인류는 안정적 생태계를 구축하기 위해 목축/농업으로 궤가 전환되었다."
"이 전환덕분에 인지오류 (소유오류/인간오류)가 증대되어 현재에 이른다."
"살만해졌다 라는 기준은 신석기 혁명을 기준으로 봐야한다."

"수많은 가축과 농산물을 지닌 인류가 경제가 어렵다는 말을 하는건
구석기적 인지오류의 결과이다."

답 :
"인간은 생태계 전체이며, 인류는 생태계 내의 한 그릇-지연이다."
"인간을 인류로 범주지으려 하는 순간 범주오류가 발생된다."
"인류사회는 신석기 혁명을 거쳐 현대문명까지 왔지만 인류인식은 여전히 구석기수준이다."
"인류신체가 여전히 구석기 신체라해서 정신까지 구석기인것은 면죄의 대상이 아니다."




2장을 마무리 해보자

2장. 우리는 왜 정의를 기대하는가


정의를 논하고자 하여, 각 챕터를 정의에 맞게끔 해석해 보고자 하였다.
각 챕터의 결론을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 "진실은 영화필름이라는 현실로 존재하고, 정의는 그스냅샷으로 만든 포스터로 존재한다."
--> "면죄받으려고 의미왜곡하지 마라."
--> "편향사고 때문에 불행의식/면죄의식에 굴복하는게 바로 지적생명체으로서 무책임이다."
--> "더 나은 순환이 정의이다. 인류뿐 아니라"
--> "구성/기술/환경의 발전을 정치범주오류를 줄이는데 쓴다면 민주주의는 발전된다."
--> "이름은 짓는 순간 범주오류가 발생된다."
--> "이름으로 범주를 발생시켰다면 끊임없이 그 범주오류를 줄이도록 해야한다."
--> "올바른 완전으로 이행이라는 책임에 대한 상호작용의 총체가 소유이다."
--> "이익이 책임이라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 그 파장은 너무 크고 답도 못찾는다."
--> "죽게 생겼을때 생긴 소유에 대한 오류는 살만할때 잡자."
--> "살만할때란 목축/농업을 시작한 시대부터이다. 이 신석기시대부터 오류를 잡았어야 한다."
--> "인류신체가 여전히 구석기 신체라해서 정신까지 구석기 인것은 면죄의 대상이 아니다."

2장에도 정의라는 주제에 결부되지 않는 각 챕터가 있어보여 아쉽긴 하지만
그건, 그걸 정의와 결부못시킨 나의 지식부족 또는 인지오류의 결과라고 보겠다.

정의에 대한 결론을 내보자면 이렇게 되겠다.

"정의가 올바름이라면 똑바름이라는 정의가 정의인가?"

2장 시작에서 던진 질문인데, 여기에 답이 있지 않을까 한다.
인간은 똑바름이라는 정의를 찾음으로서 올바름이라는 정의를 규정하려고 하는데 이건 불가능이라고 본다.
각론의 결과에서 보듯이 인간의 면죄심리와 인지오류의 결과로
특정인간범주의 똑바름의 정의로 근원적 올바름의 이행이라는 걸 회피하는데에 쓰인다고 보기 때문이다.
마치 죽기싫어 영생을 추구하는 것처럼. (아.. 빨리 죽어라는 뜻은 아니다.)

허나, 존재라는 불완전궤 자체는 새로운 올바름으로 이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또 그 책임이 있기에,
불완전궤 자체의 어떤 존속의지-지연이 어떤 나름의 똑바름을 찾고 이름을 정해 범주오류를 일으켜
그저 거기에 여기에 안주하려고 하는 책임회피는 면책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정의는 계속 나아가야 한다.
모든 인류의 지성을 다해 끊임없이 그 오류를 줄이면서 보다 올바른 순환궤로 전환하는 것.
그게 존재의 책임이다.
그게 진정한 올바른 삶이고, 그게 진정한 영생이다.

무얼해도 오류가 있을 뿐이니 정의는 없다라며 현실안주한다라는 허무주의는
존재의 책임회피일 뿐이다.
이미 수천년전 성인들이 그토록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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